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 나의 아저씨가 될 수 없는 이유

김부장은 불편하고, '나저씨'는 애틋하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아저씨’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 모순된 감정을 갖는다.
어딘가 불편하고 촌스럽지만, 동시에 익숙하고 정겹다.

이 시대의 아저씨들을 다룬 대표적 드라마를 꼽으라면,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야기>와 <나의 아저씨>를 떠올린다.

두 작품 모두 대기업 임원을 앞둔 중년 남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는 묘하게 닮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젊은 세대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서는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같은 ‘아저씨’지만 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다르다

<김부장>  속 젊은 세대는 마치 가르쳐야 하는 대상, 또는 철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요즘 애들은 운이 좋아서 편하게 산다”는 묘한 우월감, 그리고 “그래도 내가 가르쳐줘야 한다”는 보호자적 태도가 깔려 있다.

반면 <나의 아저씨>는 다르게 본다.
그곳의 젊은 세대는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회가 없어서 넘어지고, 외면받아서 거칠어졌다.
조금만 손 내밀면 충분히 제 몫을 할 사람들.
드라마는 그들의 서사를 안타까움과 애정으로 대한다.

 

김부장은 돈을 말하고, 나저씨는 사람을 말한다

<김부장>이 불편한 이유는 그의 불행이 돈의 손익표에서만 정의되기 때문이다.
서울에 집이 있고, 대기업 중간관리자까지 올라온 사람이
“남들처럼 더 가지지 못해서”
“위에 올라가지 못해서”
자기 인생을 실패라 여긴다.

그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한 감정이 든다.


그게 그렇게 비참한가?
그리고 과연, 그 감정에 공감하길 원하는 걸까?

 

다음 세대는 집 한 채가 인생 목표가 되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
태생적으로 이미 경기장 밖에 있는 누군가의 앞에서
“나는 그래도 더 못 올라가서 힘들다”라며 눈물 흘리는 모습은
어쩐지 연민이라기보다 자기 연민(self-pity)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이 드라마를 보며 여전히 자신만 불쌍하다 말하는 현실 속 또 다른 김부장을 볼 때,
왜 요즘 사람들이 "영포티(Young + Forty)"를 비꼬는지 알 것 같다.
이는 시대의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만 피해자라 믿는 세대의 오만함에 가깝다.

반대로, ‘나저씨’는 다르다

<나의 아저씨>  속 아저씨는 많이 갖지 못해도 단단하다.
삶으로 얻은 상처 때문에 굽은 것이 아니라, 버틴 시간 때문에 묵직해진 사람이다.
앞에서는 무뚝뚝해도
뒤에서는 조용히 챙긴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보는 이들을 위로한다.

 

단순히 이선균 배우님이 연기한 역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후게의 동네 사람들, 아저씨들이 그랬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묻고 싶어진다.

“다음 세대가 기억할 좋은 아저씨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이 시대의 좋은 아저씨란...

두 드라마를 함께 떠올릴 때,

묘하게 두 작품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배우 박수영이 연기한 캐릭터다.

 

건물주라서 의미 있는 게 아니다.
그가 가진 태도 때문이다.

그는 나이가 들었지만 허세가 없다.
부를 가졌지만 그것을 과시하지 않는다.
가끔은 벌벌대고, 가끔은 못나 보이지만
결정적 순간에 사람에게 손을 뻗을 줄 아는 사람.

그는 말없이 보여준다.

 

괜찮은 아저씨란 완벽한 어른이 아니라,

조금 가진 것으로도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라고.